퇴근 뒤 작은 앱을 하나 만들어 보고 싶었다. 기능을 떠올리자마자 질문이 따라온다. 누가 쓸까, 돈이 될까, 꾸준히 운영할 수 있을까. 답이 흐릿하면 에디터를 열기도 전에 아이디어를 접는다.

사진을 찍고 싶을 때도 비슷하다. 사진은 게시물이 되고, 여행은 정리 콘텐츠가 된다. 취미에는 채널 이름과 업로드 주기가 붙는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어느새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프로젝트로 바뀐다.

Zach Chmael의 글 Make Something Nobody Asked For는 이 순서를 뒤집는다. 무언가를 먼저 완성하고 쓸모는 나중에 정하자는 제안이다. 시장과 사용자를 무시하자는 뜻은 아니다. 아직 이름 붙지 않은 호기심이 자랄 자리 하나는 남겨 두자는 이야기다.

모든 아이디어가 회의실로 들어갈 때

개인적인 호기심이 독자와 성과와 지표를 차례로 요구받으며 사업 계획으로 바뀌는 흐름
쓸모를 너무 일찍 묻으면 만들기도 전에 아이디어가 심사 자료로 바뀐다.

직업에서는 당연히 쓸모를 따진다. 프로젝트에는 독자가 있고 해결할 문제가 있다. 결과를 확인할 지표도 필요하다. 의뢰받은 일은 이런 제약 덕분에 끝까지 완성되고 실제 사람에게 도달한다.

이 사고방식이 사적인 관심까지 파고들면 문제가 생긴다. 원문은 사진이 게시물로, 여행이 요약 콘텐츠로, 이상한 아이디어가 스타트업으로 변한다고 적는다. 개인 에세이마저 잠재 고객을 모으는 자산이 되면 무언가가 그 자체로 남기 어렵다.

쓸모는 좋은 편집자지만 나쁜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아직 모양도 잡히지 않은 생각에 대상 독자와 사업 모델부터 요구하면 안전한 답만 남는다. 설명하기 쉬운 아이디어가 살아남고, 직접 만들어 봐야 알 수 있는 아이디어는 사라진다. 실패할 위험과 함께 예상 밖의 것을 발견할 가능성까지 줄어든다.

그렇다고 업무의 기준을 버릴 필요는 없다. 영역을 나누면 된다. 고객과 결과가 먼저인 작업은 그대로 둔다. 대신 한구석에는 결과물이 생길 때까지 사업 근거를 제출하지 않아도 되는 작업을 남긴다.

쓸모없는 작업이 사람을 훈련한다

의뢰받지 않은 작업이 주의력과 순서 구성과 완성 능력과 취향을 거쳐 나중의 유용한 작업으로 이어지는 구조
당장의 결과보다 만드는 사람에게 남는 능력이 먼저 쌓인다.

Chmael은 15살에 소설 한 권을 쓰고 출판 에이전트에게 보냈다. 몇 년 뒤에는 친구들의 스케이트보드와 스노보드를 찍어 영화를 만들었다. 부탁한 사람도, 독자 전략도, 수익화 계획도 없었다. 둘 다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요한 건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사진은 프레임에 무엇을 넣고 뺄지 결정하며 주의력을 훈련한다. 영화는 좋은 장면도 순서가 틀리면 나쁜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서툰 영화라도 끝내 보면 완벽한 영화를 위한 참고 자료만 모을 때보다 완성하는 힘이 남는다. 중간에 생긴 문제를 직접 고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도 자기 이름으로 닫아 본다. 이 경험이 다음 작업의 출발점이다. Chmael은 유용한 일이 창작을 대체한 게 아니라 창작에서 자랐다고 말한다. 만들면서 관찰하고 고르고 배열하는 법을 배웠고, 그 능력이 나중에 필요한 문제를 알아보는 바탕이 됐다.

외부 브리프나 전환율이 없으면 무엇이 좋은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 판단이 취향이 된다. 주제와 기준, 들일 노력까지 직접 정했으므로 결과를 과제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의뢰받지 않은 작업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판단의 책임을 혼자 지는 작업이다.

원문에서 눈에 남은 문장은 짧다.

Finish first.

무엇을 배웠는지는 완성한 뒤에야 제대로 보인다. 직업이나 고객, 독자로 이어질 수도 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 가능성을 시작 조건으로 걸지 않았기에 호기심은 미래 성과에 대한 투기가 되지 않는다.

AI는 거리를 줄이고 질문도 앞당겼다

아이디어 직후 평가하는 경로와 AI로 먼저 만든 뒤 용도를 판단하는 경로를 비교한 그림
AI는 제작을 빠르게 하지만, 평가까지 첫날로 당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이미 가진 기기로 글을 쓰고 디자인하고 코드를 만들 수 있다. AI는 익숙하지 않은 분야의 첫 결과물까지 가는 시간을 더 줄였다. 원문 표현대로라면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와 실제 결과물 사이의 거리가 거의 사라졌다.

제작 문턱이 낮아진 만큼 평가도 빨라졌다. 만들기 전에 틈새시장을 찾고, 알고리듬이 좋아할지 계산하고, 반복 가능한 형식인지 묻는다. 원문은 이런 질문이 30일째에는 훌륭할 수 있지만 첫날에는 아이디어를 죽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AI에게 시장 조사와 이름 짓기부터 맡기면 아이디어는 금세 익숙한 제품 모양을 갖춘다. 그럴듯한 소개 문구와 기능 목록도 나온다. 하지만 아직 직접 만져 보지 않은 생각을 너무 일찍 설명해 버린다. 결과물의 성격을 발견하기보다 이미 잘 팔리는 형식에 맞추게 된다. 질문이 선명해지기 전에 답안의 모양부터 고르는 꼴이다.

AI는 심사위원보다 작업대에 둘 때 더 유용하다. 낯선 도구의 사용법을 묻고 작은 시제품을 만드는 데 쓴다. 무엇이 될지는 결과물을 본 뒤 판단한다. 만드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사실과 가치를 빨리 증명해야 한다는 요구는 별개다.

시작 전에 묻는 다섯 질문

반응과 호기심과 크기와 제약과 가치 추출 시점을 차례로 점검하는 다섯 질문
다섯 질문은 성공 가능성보다 실제로 끝낼 수 있는 호기심을 고른다.

목적 없는 작업도 경계가 없으면 흐지부지된다. 원문은 시작 전에 다섯 가지를 확인한다. 첫째, 아무 반응이 없어도 계속 관심이 있을까. 공개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반응이 오기 전에도 존재할 이유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둘째, 직접 해야만 답을 얻을 만큼 궁금한가. 메모 앱에서 생각만 정리해도 끝나는 질문이라면 작업이 필요하지 않다. 특정 느낌의 사진을 만들 수 있는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도구를 만들 수 있는지는 결과물로 답해야 한다.

셋째, 설명하다 지치기 전에 끝낼 만큼 작은가. 원문은 3분짜리 영화, 사진 10장, 작은 애플리케이션, 단편 소설을 예로 든다. 새 정체성이나 거대한 계획을 시작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하나를 실제로 존재하게 만드는 게 목표다.

넷째, 어떤 제약이 작업의 성격을 만들까. 카메라 하나, 오후 한 번, 동네 하나, 페이지 한 장, 일주일처럼 경계를 정한다. 스스로 고른 제약이 클라이언트의 브리프를 대신한다. 선택지가 줄면 부족한 장비나 시간이 핑계가 되기 어렵다. 무엇을 더 넣을지보다 어디에서 멈출지가 선명해진다.

다섯째, 결과물이 생길 때까지 가치 추출을 미룰 수 있는가. 첫 작품을 끝내기 전에 시리즈부터 발표하지 않는다. 기술을 배우면서 강의를 설계하지 않는다. 제작 기록이 제작보다 커지게 두지도 않는다. 먼저 끝낸 뒤 독자와 사업 모델, 후속작이 필요한지 정한다.

이해관계자는 없어도 기준은 남긴다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다”는 말은 보통 쓸데없는 일을 했다는 비판으로 쓰인다. 여기서는 반대다. 외부 이해관계자가 없으니 주제와 기준을 고르는 일이 전부 자신에게 돌아온다. 낮은 품질을 허락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을 시험할 기회를 얻었다. 승인을 기다릴 사람이 없으므로 언제 충분한지도 직접 결정해야 한다. 자유가 커진 만큼 책임도 커진다.

생활비와 납기는 예술적 의도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모든 일을 목적 없이 하자는 이야기도 현실적이지 않다. 의뢰받은 작업은 계속 필요하다. 다만 그런 일을 해낼 사람을 만든 것은 과거에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던 작업일 수 있다.

작게 시작할수록 좋다. 한동안 마음에 남았지만 쓸모를 설명하지 못해 미뤄 둔 것을 하나 고른다. 일주일 안에 끝낼 크기로 줄이고 도구와 범위를 정한다. 만드는 동안에는 홍보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완성한 뒤에만 다음 용도를 묻는다. 공개하더라도 조회 수를 성패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이번 작업에서 스스로 고른 기준을 지켰는지 먼저 본다.

모든 창작 충동이 회사가 될 필요는 없다. 모든 취미가 채널이 될 필요도 없다. 이해관계자는 없지만 높은 기준은 있는 결과물 하나면 충분하다. 나중에 유용해져도 좋고, 끝내 자신의 하드디스크에만 남아도 좋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원문: Make Something Nobody Asked For (Zach Chmael, 2026) / GeekNews 소개